정약용의 나이 31살에 정조는 평생의 숙원 사업인 화성 축성을 맡겨 10년을 목표로 6Km에 달하는 거대한 행정 수도 건설을 시작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소가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하다 싶어 이장하고 묘소를 옮긴 곳이 바로 지금의 화성이었다.
정조는 또한 대단위 국책사업, 신도시 프로젝트를 통해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왕의 치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있지만 많은 인력을 공사장에 동원하여 고용을 창출 할 수 있기 때문에 실행한 것으로도 보인다.
다산은 그의 뜻을 알고 심혈을 기울인 끝에 화성 설계 방법을 집대성해 정조에게 바쳤고 정조는 이를 화성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았다.
1796년에 완성된 수원화성은 국내외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한 가장 아름답고 과학적인 성으로 화성 행궁을 둘러싼 육중한 성벽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사대문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화흥문 등이 잘 조화돼 있다.
원래 십 년을 목표로 지어진 화성은 1794년에 축조하여, 2년 반 만에 완성되는 기적에 가까운 공사 기간을 자랑한다.
흉년 때문에 6개월간 공사가 중단된 기간을 뺀다면 실제 성과를 짓는데 걸린 시간은 단 28개월이었다.
다산은 수원화성 축조에 효율적인 건축 시스템을 도입했다.
신속한 공사를 위해 건축 자재를 원활하게 공급하는 방법을 고민했던 그는 표준화된 자재 공급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며 당시 기술로 18만개가 넘는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았다는 사실은 지금 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돌을 다듬은 장인들에게 후한 값을 지불하고 수시로 잔치를 열어 백성들은 더 힘을 내 공사에 임할 수 있게 했다고도 한다.